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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왕곡마을 주거형태 - jtbc 트레일 코리아 토야호 전라도 전남 순천여행 2

by journeylore 2025.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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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곡마을 주거형태,왕곡마을 주거형태들

 

 

소카존으로 향하는 길.

 

오늘도 날이 아주 좋습니다.

 

물이 많이 떨어진 작은 강. 잠시 후 소카존에 도착한다.

 

이와 같이 앱을 이용하여 소카를 빌릴 수 있다.

 

렌탈을 하기 전에 차량에 대해 신중하게 체크도 해야 한다.

 

조심스럽게 차를 확인한 후,

 

음악을 들으면서 운전하므로 곧바로 낙안읍성촌 주차장에 도착한다.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려 있다.

 

낙안읍성촌에 가기 위해 입장권을 구입. 다양한 방법으로 할인이 가능합니다. 제 경우에는 jtbctrailkorea의 토야호 순천 여행 패스포드를 제출하여 입장료의 50%를 감면하였습니다.

 

순천락 안읍성. [ Naganeupseong Walled Town, Suncheon , 순천창안읍성 ] 이 장소는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남대리 낙안읍성 일대에 있는 민속촌. ,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물품 보관소도 보인다.

 

관람시의 주의 사항도 보이고.

 

도르멘군도 있다.

 

다른 백과사전 자료를 찾아보면 낙안읍성 안에는 상쾌한 기와 지붕의 관저 건물이 있지만, 낙안읍성은 무엇보다 초가옥이 옹기 종기 모인 마을이며, 한층 더 정감이 있는 민속촌이 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통해 전국 초가가 모두 사라져 지금은 전통한옥 부채에서도 그 모습을 찾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됐지만, 여기 낙안읍성의 경우 마을 전체에서 초가집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서민가옥인 초가옥에 대해 보고 배우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지금 낙안읍성이 부족해서 생각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낙안성 민속촌에서는 우선 경직된 기와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지붕의 곡선과 담의 우아한 선을 마음껏 보고 느낄 수 있다. 지붕에서 담의 선을 따라 보면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하는 정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로 돌 위에 놓인 하얀 고무신이라도 보게 되는 날에는 곧바로도 눈 속에서 트림하는 소리가 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해진다. 잘생긴 우물의 둥근판은 아니지만, 때린 대청환의 판자는 세월이 묵을 만큼 결이 그대로 느껴져, 고풍스러운 느낌도 하고, 초가 집과 잘 맞으면서 소박한 멋도 있다. 현재 한국에서 민속촌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낙안읍성을 포함해 제주도의 성읍촌, 안동의 하회촌, 고성의 왕곡촌, 성주의 한가촌, 월성의 버킷촌, 아산의 외암촌 등이 있다. 이들 민속촌 중에서 이곳 낙안성처럼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에서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며 예전과 같은 생활의 모습과 문화를 잘 유지하고 있는 곳도 드물다. 읍성이 여기처럼 잘 보존되어 있으며, 또한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곳도 없다. 특히 이 마을은 성벽을 따라 초가 지붕이 안과 밖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성벽 위를 걸어 거리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봄에는 봄에 여름에는 여름에 촛불의 이시가키와 어울리게 피는 다양한 각종 꽃과 풍경은, 시간이 이 마을에서 정지해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순천 여행시 들어 보면 좋은 낙안읍성촌의 지도.

 

입구에는 관광안내소도 있다.

 

입구로 향한다.

 

실제 주민이 살고 있다는 전라 전남 순천여행 낙안읍성촌.

 

토요일이므로 관광객이 조금 보인다.

 

평일이 오면 더 한산인 것 같다.

 

저쪽에 보이는 산이 낙안읍성촌 관람 후에 가야 하는 금전산.

 

하지만 지금은 낙안읍성촌 관광에 집중해야 할 때.

 

전라 전남 순천여행 낙안읍성촌에서는 다양한 체험장도 운영 중이다.

 

규모가 상당히 커서 이처럼 마일스톤을 잘 보고 관람을 해야 한다.

 

잠시 이 낙안읍성촌의 가옥을 찾아보면, 자연스럽게 생산된 소재를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 집과 자연이 하나에 어울리는 것이 여기의 특징이다. 목조 주택에서는 기단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합니다. 왜냐하면 목조로 지은 한국 전통 한옥은 물기에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초를 만들어 비가 내릴 때 물에 잠기거나 집이 축축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햇빛을 충분히 받게 하여 목조 재료를 보다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을의 집들의 기단은 잘 가공된 장대석을 높이 쌓는 4대부 기와점의 기단과는 달리 둥근 덤불을 줍고, 한 줄에서 많이는 30열 쌓아 올린 것이 전부다.

 

어중간한 민박도 보인다.

 

토석담은 황토색의 흙과 강석이 되어 있지만, 크고 작은 돌이 각각 자신의 형태를 가지고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 얼굴이 다르게 자연의 모든 사물에는 같은 종류일지도 모른다 조금은 달라도 조화를 이루고 사는 생활의 일부처럼 편안하다.

 

낙안의 기록은 마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낙안은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백제 때에는 파치성이라 불리며 고려태조 23년(940)에 처음으로 낙안이라고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주변의 다양한 벌채를 관할한 행정중심지로 남해안을 지키는 군사요지로 붐비지만 1910년 일제의 행정개편으로 폐지되어 순천군으로 편입되었다. 그 후, 주변의 편리한 도로 교통을 따라 새로운 도시가 성장해, 낙안은 중심지의 기능을 잃어 버렸다.

 

그런 낙안이 민속촌으로 지정된 것은 1983년 낙안읍성 구적이 사적으로 지정된 것이다. 낙안읍성촌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민속촌이 아니라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실제 마을이라는 점이 다른 민속촌과는 다르다.

 

낙안촌이 낙안읍성촌으로 불리는 것은 마을을 둘러싼 성곽 때문이다. 보통 성곽이라고 하면 깎인 듯한 절벽이나 산기슭에 위치한 산성을 떠올리지만 낙안의 성곽은 산에 의지하지 않고 평지의 마을을 둘러싼 읍성이다.

 

읍성은 통상 평야지대와 산을 뒤에 끼워, 앞으로 평야가 펼쳐지는 준평야지대에 세워져, 지방행정관서가 있는 마을에 축성되도록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성내에 민가와 관저가 공존한다. 따라서 행정 및 군사기능을 갖춘 읍성은 평소에는 행정중심지, 유사시에는 방어기능을 갖춘 성곽으로 이용되었다.

 

읍성은 고려말에 처음 등장해 조선 초기에 널리 퍼진 한국에만 있는 특이한 형태의 성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신증동국 여지 승람>에 179개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부·목·군·현 등의 행정구역이 330여여 있었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전회 투어읍성이 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낙안읍성 외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읍성으로는 충남 서산해 미읍성, 전북 고창형읍성 등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낙안읍성은 인조 4년(1626) 낙안군수에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큰 칼로 낙안촌 뒤에 있는 금전산 바위를 내려 하루 종일 쌓았다고 한다. 이는 임업장군이 실시한 개축공사가 그의 공적과 섞여 백성에게 과장되어 전해졌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당시 낙안읍성에 살던 인구가 불과 1,000여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적은 인원이 어디서 수만개의 돌을 옮겨 와서 어떻게 이런 규모의 성을 쌓을 수 있었는지 매우 놀랍게 이상하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지금도 임경장군의 선정비가 남아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임장군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매년 정월의 보름달에 마을의 안녕을 기도하는 마을 축제를 보낸다.

 

한편 임경업 장군이 하룻밤에 석성을 쌓았다는 전설 중에는 지혜가 있는 임 장군 누나의 형의 사랑 이야기가 곁들여지고 있다. 임장군의 언니는 왜구를 쓰러뜨리는 궁리를 하는 장군이 보고 돕고 싶었다. 누나는 동생에게 성곽을 쌓게 하고, 자신은 낙안군사들의 군복을 만드는 베팅을 제안했다. 언니가 군복을 다했는데 동생이 성을 완성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언니는 모두 세운 군복의 복고를 하나씩 잡고 다시 붙이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언니는 동생이 성을 모두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마지막으로 동생의 복고만 붙이지 않고 남겼다고 한다. 동생의 사기를 깨지 않는다는 누나의 지혜의 배려였던 것이다.

 

현재 읍성 출입구로 이용되고 있는 동문에서 남문 사이의 성곽이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이는 남해순천만을 통해 내륙에 휩싸이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므로 특히 왜구가 들어오는 남부가 튼튼하고 지금까지도 상태가 양호하다고 추측된다. 성의 북부가 상대적으로 많이 무너진 것은 왜 적이 들어오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약간 약하게 지어진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여순 사건 때 산 속에 있는 사람들이 종종 마을로 왕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낙안읍성을 되돌아볼 때는 동문에 들어가 문 위의 가시토요 가시에 올라 성곽을 따라 일주한 뒤 마을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특히 남문을 통해 성 북쪽에 돌 계단이 이어지는 곳에서 내려다 보는 마을의 정취가 가장 좋다.

 

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을 한 채 한 채 선택해 보면 입가의 맛이 줄어들고, 또 마을 내 민속주점 탓에 마음과 시선을 주는 것은 어렵지만, 여기에 올라가면 이런 결점이 묻혀 마을 전체의 부드러운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장소에서는 낙안읍성촌을 둘러싼 자연경관도 매우 아름답게 바라본다.

 

이런 학교도 보여.

 

생각보다 많이 보는 전라 전남 순천여행 낙안읍성촌.

 

다른 곳에서 자료를 찾으면,

 

깨끗한 옛 길.

 

어중간한 실재주민이 사는 공간도 보이고.

 

주변에 체험관은 정말 많다.

 

조금 더 걸어서 광장 쪽으로 가면,

 

이렇게 막걸리도 가득 쉴 수 있는 주막이 보인다.

 

낙안읍성은 북쪽에는 진산의 해발 668m의 금전산, 동쪽에는 해발 192m의 고봉산, 남쪽에는 해발 563m의 제석산과 부룡산, 그리고 서쪽에는 해발 584m의 백리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읍성 주변은 분지형의 넓은 평야지대가 발달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가까이 바다와 접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드물게 밭의 한가운데에 쌓인 평지성이며, 전체적인 형태는 남벽의 길이가 북벽에 비해 긴 사다리꼴의 평면형태를 이룬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계획도시로 조선시대 마을 중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마을 중 하나로 평가된다. 조선시대의 도성인 한양의 입지조건과 가장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특히 읍성 속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전해지는 전통적인 면모를 그대로 소중히 하고 있으며, 한국의 민속을 조사하는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전라 전남 순천여행 낙안읍성은 철저한 사전 기획으로 축조한 읍성이다.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아 올리는데 불과 1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처럼 짧은 작업기간은 토성에서 나온 흙을 돌로 쌓아 올린 외벽을 지탱하는 내측 내탁부의 축조와 성벽의 상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사용하며, 각 타카오의 병사들을 동원하여 미리 읍성 축조에 필요한 성석을 미리 모아두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 앞으로 철저한 계획과 사전 작업을 거쳐 완공한 읍성임을 알 수 있다. 성내의 도로는 3개의 성문을 연결하는 T자형의 도로망을 갖추고 있다.

 

낙안읍성은 기초부에 성벽 등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흙에 쌓인 돌인 지대석을 놓고, 외벽은 외면만 거칠게 정돈된 갈라진 돌로 쌓아 서서히 올라가면서 작은 돌로 쌓아 마무리하고 있다. 좌석 사이에는, 베개석으로 별석을 확실히 고정하고, 수평선째와 수직선째를 맞추지 않는 헤이튼층 적층을 했다. 내벽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도록 흙으로 쌓인 내탁식 구조로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축성방식에 잘 따르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조선시대의 내탁식 구조가 아니라 성벽의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은 협착식 성벽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최근 들어 성벽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잘못 복원한 것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원래 성벽은 위로부터의 하중에 견딜 수 있도록 지대석을 놓고 1026cm 정도 뒤에 찔러 아래에서 위로 향해 성석의 크기를 바꾸면서 성벽을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도중에 보이는 체험 코너.

 

옆쪽으로 먼저 말한 성벽의 길이로 보인다.

 

성벽의 길을 따라 오른다.

 

멀리 보이는 돈. 이어 등산해야 하는 산이다.

 

성벽에서 보는 낙안민속촌도 꽤 멋있다.

 

조금 걸어 보면 보이는 가파른 계단.

 

천천히 계단을 오르면 낙안읍성촌이 한눈에 더 잘 들어온다.

 

기념 사진 한 장.

 

기념 사진 2장.

 

석순으로 고쳐 적층 작업은 1450년경에 거의 마무리되었지만, 당시 성벽 주위는 2,865척으로, 높이는 평지에서 척이지만, 높은 곳은 척이며,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여장이 420척으로 높다. 또 성문은 3곳이었지만 옹성을 두지 않고 옹성과 성문을 지키기 위해 성문 옆에 쌓은 사각형 적대는 12개를 만들기로 했지만 4개만 설치했다고 전한다.

 

성 안에는 우물 2곳과 연못 2곳이 있어 성 밖에 성벽을 둘러싼 垓子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옹성은 그 배후에 설치되어 여장도 무너진 것을 다시 쌓아 올렸지만 지금은 모두 무너지지 않게 된 상태다.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의 모습은 성벽의 축조와 적대의 존재 등으로 조선 초기 성곽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읍성은 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동서 방향의 긴 직사각형에 위치하고 있다. 동문은 악풍원(樂豐樓), 남문은 쌍청원(雙淸樓, 진남원), 서문은 악추문(樂秋門) 등으로 불리는 것만으로 남아 있는 것만으로 옹성은 남문 흔적과 서문 흔적에서만 흔적을 볼 수 있다. 적대는 전하는 기록대로 동문의 좌우와 동북·동남의 뿔에 각각 하나씩 있다.

 

성벽의 주위는 5킬로미터이다. 동문터 남부가 가장 잘 남았지만 높이는 m로, 상폭과 하폭은 각각 34m, 78m이다. 아래쪽에 큰 관석을 이용하여 쌓아 올리면서, 틈새마다 작은 돌을 쐐기, 위쪽으로 갈수록 석재의 크기를 줄였다.

 

1시간 정도 둘러봤지만 아직 보는 일이 많다.

 

뤄안 게스트하우스.

 

공연이 열리고 있다. 영상으로 찍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 아쉽다.

 

주말에는 공연이 많이 열리는 것 같다.

 

놀이 공원.

 

아직 보이지 않는 리즈키 홍매화.

 

잠시 사진을 찍는데 집중한다.

 

얼음물 1,000원.

 

순천여행 낙안읍성마을에서 나온다.

 

뿌리 깊은 나무 박물관.

 

이봐, 당신은 지금 허구를 보고 있습니다. Hey youre watching fiction now.

데스만은 어느 좋은 날에 공개됩니다. 내 인생에 함께 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D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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